
HOME 비망노트
자유게시판
개인연구실 세상사는 이야기 공 부 방 자연과학이야기
나의 산행 일지 산행일지
왕초보 자평명리 명리 연구 자료실 이름감명프로그램
197075 번째 방문객 (오늘 55명)
|
경주이씨 백사 이항복 선생 묘오성(鰲城)대감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조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묘는 경기도 포
천군 가산면 금현리에 있다. 의정부에서 포천 가는 43번 도로로 축석령을 넘으면 송우리가 나온다.
하송우리에서 우회전하여 316번 도로를 따라 가산 쪽으로 약 2Km 정도 가다 보면 우측에 "백사 이항복 묘소 입구"라는 표시판이 나온다. 이 표시판을 따라 우측으로 구불구불한 마을길을 따라 가면 정면2칸 측면1칸의 아담한 사당이 나오는데 사당 뒤 야트막한 동산에 이항복 묘와 부인인 권율 장군 딸 안동권씨(安東權氏) 묘가 나란히 쌍묘로 있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씨의 시조는 신라 박혁거세가 왕이 되었을 때 아찬(阿粲)에 올라 군무를 장악했고, 유리왕 9년에 이씨(李氏) 성을 하사 받은 이알평(李謁平)이다. 우리 나라의 이씨는 중국에서 귀화해온 몇몇 본관의 이씨를 제외하면 거의 이알평의 후손에서 분파(分派)하였다. 경주 이씨는 신라 때 소판(蘇判) 벼슬을 지낸 이거명(李居明)을 기세조(起世祖)로 하여 고려말 이제현(李齋賢)을 배출하면서 삼한의 명족(名族)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이항복의 아버지 이몽량(李夢亮)은 명종때 광산군(廣山君)으로 봉해졌고 강원도 관찰사와 대사헌, 동지중추부사, 형조판서, 우참찬에 오른 인물이다.
백사(1556-1618년)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의기롭고 호방한 기질을 지
닌 그는 다섯 살 아래이면서도 점잖은 한음 이덕형(1561-1613년)과 친하게 지냈다. 그들의 어릴 때 일화는 기지
와 익살로 많이 전해오고 있는데 고향이 다르고 나이 차이로 보아 후에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이항복은 열 다섯에 어머니를 여의고 3년 상을 마친 다음 곧장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에 힘쓰다가 선조 13년
(1580년) 25세 때 알성문과 병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약관 20세의 이덕형도 과거에 급제하여 둘은 홍문관에 들어가 함께 일을 했는데 아마 이때 친하게 지낸 것 같다. 한음과 오성은 서로 같은 벼슬을 물려주면서 했는데 나
이는 어리지만 한음이 조금씩 앞섰다. 한음은 31세에 대제학을 지내고 그 자리를 오성에게 물려 주었고, 38세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이어 좌의정이 되니 오성이 우의정이 올랐으며, 한음이 42세에 영의정이 되자 오성이 좌
의정이 되었다가 한음의 뒤를 이어 영의정에 올랐다.
오성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가 있는 선산(先山) 청룡 능선에 묻히게 되었다.주산은 한북정맥(漢北正脈)이 서
울로 가는 도중에 있는 죽엽산(600.6m)이다. 죽엽산에서 중출로 출맥한 용은 개장(開帳)하면서 기복(起伏)하
고 기복 하면서 위이하며 힘차게 내려왔고, 청룡 백호는 주룡을 가깝게 호종(護從)하였다. 선산에서 보면 청룡 능선이지만 실제로 죽엽산에서 중출로 출맥한 주룡이다. 선산은 오성 묘의 백호에 해당된다. 왜냐하면 용의 기
세가 선산을 이룬 용은 순수하기는 하나 크게 변화가 없는 반면에 오성 묘의 주룡은 힘있게 변화를 많이 했기
때문이다.
높은 죽엽산에서 평지로 급락(急落)한 용이 야트막한 산으로 기봉하고 좌우로 몸을 흔드는 위이를 하면서 용진
처(龍盡處)에 다다라서는 결인속기하여 순수한 생기만 모았다가 약간씩 볼록 볼록하게 기복하면서 행룡하여 입수도두(入首到頭)를 만들고 옆으로는 선익(蟬翼)을 뻗치고 앞에서는 순전(脣氈)을 만들면서 혈을 결지하였다.
특히 순전이 풍만하고 튼튼하며, 혈 앞 하수사(下水砂)는 좌우 양쪽에서 나와 혈을 감아주었는데 우측의 하수사
가 더 발달되어 좌측에서 나온 물을 걷어 준다.
안산(案山)과 조산(朝山)은 아미사(蛾眉砂)로 층층으로 중첩되게 감싸주고 있으며 안산과 조산에서 나온 물이
혈 앞 명당까지 들어와 조입당전(朝入堂前)하고 있다. 물의 조입당전은 부귀와 함께 크게 현달한 자손을 배출하게 하는 길수(吉水)이다. 대개 혈 후면에서 나온 물이 혈 옆으로 하여 앞으로나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오성 묘의 경우 앞에서 들어온 물과 혈 좌측과 우측에서 나온 물이 명당에서 합수(合水)하여 혈을 환포(環抱) 해준 다음
혈 우측으로 빠져나간다.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의 방위는 건해(乾亥)이며 물이 좌수도우(左水到右)하면서 혈 우측에서 나온 작은 물과 합수 하므로 술좌진향(戌坐辰向)을 놓아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으로 길향(吉向)인 정묘향(正墓向)으로 좌향
을 하였다.
형국은 죽엽산에서 용이 평지로 쏜살 같이 내려 왔다가 몸을 틀어 기복 하면서 들판을 행룡하다가 여의주를 물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오르려는 모습이므로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고 한다. 이때 입에 문 여의주는
혈이고, 층층으로 있는 아미 옥대 안산과 조산은 뭉개 뭉개한 구름으로 보는데 이를 상운사(祥雲砂)라고 한다.
이항복과 안동권씨의 묘 좌측에는 오성의 둘째 부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금성오씨(錦城吳氏)` 묘가 있다. 언뜻 보아서는 혈이 아닌 듯 하지만 묘 앞 하수사가 좌에서 우로 감아 준 다음 다시 우에서 좌로 감아 주어 생기를
단단하게 융취(融聚)하였다. 이 하수사가 혈임을 증명하고 있는데 이를 혈증(穴證)이라고 한다. 묘 뒤 결인속기
처에서 볼록볼록하게 기복 하면서주맥은 오성 묘로 내려 보내고, 좌측으로도 용맥을 만들어 생기를 내려보냈
다. 이 묘는 주산인 죽엽산을 바라보고 혈을 결지 하였으므로 회룡고조혈(回龍顧祖穴)이며, 묘 좌우 선익이 잘
발달되어 있다.
선익은 주룡과 함께 자손을 관장하는데 경주 이씨 중 금성 오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자손들이 안동 권씨에게서
태어난 자손들 보다 더 잘되었다고 후손들은 전한다. 금성 오씨 부인은 본래 상민이었는데 미모가 있으면서도
영특하고 시와 문장에 능해 한음과 백사 등 당시 저명 인사들과 교류를 하였다고 한다. 오씨는 본래 점잖은 한
음 이덕형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적극적이고 호탕한 오성 이항복이 둘째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그녀는 오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기지를 발휘하여 곤경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임진왜란이 일어나 오성이 의주로 임금을 모시고 피난을 떠나자 같이 동행하여 온갖 고생을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이 공로로 그녀와 그녀의
소생들은 면서(免庶)를 받았다.
경주 이씨는 조선조에 8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 178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씨들의 활약은 조선중
엽 이후 특히 두드러졌다. 백사의 후손들 중 이태좌(李台佐)가 영조 때 좌의정을 했고, 이광좌(李光佐)는 소윤 4대신의 한사람으로 숙종과 영조 때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지냈으며,이태좌의 아들 이종성(李宗城)이 좌의정과 영의정을 지냈다.  | 이 글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
997 번째로 읽음
작성 일자 : 0000/00/00 00:00
수정 일자 : 2004/10/19 2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