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는 착각에서 비롯

창공의 파란 빛깔은 어디 가서 만날까-공의 열 가지 비유

덕녀(德女)라는 여인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명(無明)은 안에 있습니까?”

지혜가 없는 어리석음이란 것이 나의 내부에 있느냐는 질문에 부처님은 답하십니다.
“아니다.”

“그럼 밖에 있습니까?”
그 어리석음이란 것이 나의 외부에 있다가 내게 오는 것이냐는 질문이지요.
부처님은 답하십니다. “아니다.”

“그럼 안과 밖에 함께 있습니까?” “아니다.”
“그럼 이 무명은 전생에서 온 것입니까?” “아니다.”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건너가는 겁니까?” “아니다.”
“무명은 생겨난 것이고 멸한 것입니까?” “아니다.”
“그렇다면 무명이라 부를 어떤 실제가 있습니까?” “아니다.”

덕녀는 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무명으로부터 행(行)이 발생하고, 그리하여 괴로움이라는 덩어리가 생겨난다는 말씀은 대체 뭡니까? 가령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줄기와 마디와 가지, 잎, 꽃, 열매가 나올 수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덕녀의 궁금증에 충분히 공감합니다. ‘무명’이란 말은 부처님에게서 나온 말인데 그게 어디에 있느냐고 묻자 죄다 ‘없다’ ‘아니다’라고만 대답하시니 헷갈릴 수밖에요.

이제 부처님의 해답이 나옵니다.

모든 가르침 허깨비 같다는
이치 환히 아는 이가 보살

“모든 법의 모습(相)이 비어있건만 그런 이치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지혜도 없는 중생은 여기에서 온갖 어지러운 생각(번뇌)들을 일으킨다. 그 번뇌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업을 지으며, 그 업으로 말미암아 다음 생의 몸을 짓고, 그 몸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나 즐거움을 누린다. 이 중에 실제로 번뇌를 짓는다는 건 없으며, 따라서 몸과 말과 뜻의 업도 없고, 괴롭거나 즐거움을 누리는 것 또한 없다.”

<덕녀경(德女經)>의 내용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번뇌란 것이 돌멩이나 볼펜처럼 만져지는 것도 아니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해서 생긴 착각이거늘 그 착각을 진짜라고 생각해서 “그러니까 이제 나는 이렇게 해야 해”라거나 “그렇다면 저건 이러저러한 것이야”라거나 기분 좋다거나 짜증난다며 온갖 것을 빚어내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란 말이지요.

자, 그렇다면 다시 물어볼 만합니다. 대체 무명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이 물음을 받고 “음…. 그 무명이란 건 말이지요….”하면서 열심히 머리를 굴리면 ‘범생이’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것을 사실인 양 착각하고 있는지 퍼뜩 알아차리고 활짝 웃으면 되는 겁니다.

아무튼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독자적인 성품이 없고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라는 게 반야(지혜)의 이치입니다. 그걸 말로 설명하려니 자꾸만 혀가 꼬이고 말에 막히게 되고,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로 ‘공’을 알려주는 열 가지 비유입니다.

“모든 법은 허깨비(幻, maya) 같고 아지랑이(焰) 같고, 물속의 달 같고, 허공 같고, 메아리 같고, 건달바의 성 같고, 꿈같고, 그림자 같고, 거울 속의 형상 같고, 변화한 것(化) 같다.” (대지도론 제6권)는 것이요, 이런 이치를 환히 아는 사람이 바로 보살이라는 것입니다.

봄날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붙잡으려고 손을 내밀어도 잡히는 게 없고, 물속에 떠 있는 고운 보름달을 붙잡으려 물에 뛰어들어도 잡을 수 없으며, 메아리는 ‘울림’일 뿐이거늘, 실제 누군가 있어 나와 똑같이 소리 지른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인 것이요,  창공이 파랗기는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아무리 올라가 봐도 파란 색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줄 알면 됩니다. 그렇다면 아지랑이는 없는 거냐고 묻지 말고, 들판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 그게 실체가 빈 것인 줄 알면 됩니다. 대지도론 제6권에는 공의 열 가지 비유에 대해 아주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