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래 벗 삼으면 생로병사 고통 벗어나사무량심①-우정에서 나온 자애로운 마음
자·비·희·사 사무량심 가운데
자심<慈心>은 상대를 벗으로 보는 마음
강의를 하러 밀양 가는 기차를 탔던 날, 조용한 객실에서 잠시 혼곤하게 잠에 빠져들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책을 펼쳐들었습니다. 아일랜드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서 자연주의 철학을 담당했던 존 개스킨 교수의 책 <여행자를 위한 고전철학 가이드>(박중서 옮김/현암사)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로마건 그리스건 터키건 훌쩍 떠나고 싶지만 꽉 짜인 일상이 나를 놓아주지 않으니 이렇게 책으로라도 여행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고른 책입니다. 조용한 기차 안에서 찬찬히 읽어가다가 내 눈에 확 들어온 문장이 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고 개인의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 방법은 에피쿠로스에게 주요한 관심사였다. 그리하여 그는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우호적으로 협동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정원’을 만들었다.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에피쿠로스는 보았다. 에피쿠로스가 옹호한 우정 즉 ‘필리아’는 때때로 ‘사랑’이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그리스어에는 ‘사랑’에 해당하는 언어가 세 가지였다. ‘에로스’는 성적인 사랑을 말한다. ‘필리아’는 성과는 무관하게 모든 인간 사이에서 가능한 우정을 의미한다. ‘아가페’는 좀 더 순화된 개념인데, 일반적으로 ‘영적인 사랑’으로 이해된다.”(211~212쪽)
인용이 좀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341년에 태어난 아테네의 철학자이자 유물론자인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들려주는 이 문장에서 나는 불교 향기를 물씬 맡았습니다. 에피쿠로스가 만든 공동체인 ‘정원’에서는 붓다의 ‘승가(sam.gha)’를, 그가 옹호한 ‘우정(필리아)’에서는 붓다의 ‘자(慈, metta)’를 느낀 것입니다.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합니다. 자비는 흔히 하나의 단어로 쓰지만 엄밀하게는 자(慈)와 비(悲)의 두 말로 나뉩니다. 자(慈)는 사랑, 자애라는 말로 번역하는데, 산스크리트로는 마이뜨리(maitr), 팔리어로는 멧따(mett)입니다. 마이뜨리는 미뜨라(mitra)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이 말은 우정, 벗이라는 뜻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생에게 품는 자심(慈心)은 그러니까 상대방을 벗으로 받아들이고, 벗으로 바라보는 우정 어린 마음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을 받는 중생들이야 감읍해서 무릎을 꿇을지는 몰라도 그 사랑을 내뿜는 부처님 마음에 우리들 중생은 구제해야 할 어리고 딱한 존재라기보다는 당신의 벗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상윳따 니까야에도 “여래를 벗으로 삼으면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수시마의 경>”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인 자(慈)는 고대 아테네에서 말하는 세 가지 사랑 가운데 ‘필리아’와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자, 이제 <대지도론>에서 말하는 자비의 항목으로 넘어가 봅시다. <대지도론>제20권에는 자비희사를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가장 먼저 네 가지 마음에 대해 그 뜻을 이렇게 정리해줍니다.
“사무량심이란 자·비·희·사를 말한다. 자(慈)는 중생들을 사랑(愛念)해서 언제나 저들이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도록 하여 이롭게 해주려는 것이다. 비(悲)는 중생들이 지옥과 축생, 아귀, 수라, 인간의 다섯 길에서 몸과 마음으로 온갖 괴로움을 받는 것을 슬프게 여기는(愍念) 것이다. 희(喜)는 중생들을 즐거움에서 환희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사(捨)는 이 세 가지 마음을 버리고 오직 중생들을 생각하되 미워하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다.”
